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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를 주도하는 흥선대원군은 조선을 개혁을 시도합니다. 그의 개혁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요? 흥선대원근의 개혁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흥선대원군의개혁썸네일

 

1. 흥선대원군의 대내정책

꺼져가는 조선을 다시 일으키려는 흥선대원군, 당시 철종은 후사가 없었으며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새우기 위해 조대비와 함께 물밑작업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노력으로 아들 명복은 12살 나이에 왕위에 오릅니다. 어린 고종 옆에서 조대비는 수렴청정을 하고 흥선대원군은 결정권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흥선대원군은 10년 동안 조선을 이끌어갑니다.

 

19세기 조선은 세도정치로 왕권은 약해졌으며 삼정문란의 폐단을 없애려고 삼정이정청을 만들긴 하지만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흥선대원군은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키고 삼정문란으로 혼란스러운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개혁을 시도합니다. 흥성대원군은 왕권강화를 위해 개혁을 시작합니다. 먼저 세도가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비변사를 폐지합니다. 행정은 의정부에서 관리하고 군사는 삼군부에서 관리하도록 합니다.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막아내어 안정시키는데 힘을 섰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양반들에게 반가울 리가 없겠죠. 그리고 우리는 역대 왕권을 강화시킨 왕들을 보면 법을 체계화하여 기틀을 잡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흥선대원군 또한 대전회통이라는 법전을 만듭니다. 각 부의 조례를 만든 육전조례을 만들어 왕권강화에 기틀을 다시 잡습니다. 흥선대원근은 더 나아가 경복궁을 중건합니다. 경복궁을 중건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원납전을 걷고 화폐가치를 떨어뜨리는 당백전을 발행하고 양반들의 묘지림을 베어다 사용합니다.

 

이러면서 양반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서도 원성을 사게 됩니다. 서학, 즉 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가 왕건강화에 걸림돌이 되는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됩니다. 전국의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모두 없애버립니다. 그 당시 선비들의 의리와 명분이었던 안동묘를 폐지합니다. 이제 민생안정을 위해서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세금 내는 곳을 확보하고 국가 재정이 증가합니다. 군대를 안 가던 양반들에게 포를 내도록 호포제를 실시합니다. 환곡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사창제를 실시합니다. 이러한 정책들은 양반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2.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

19세기 서양은 조선과 통상수교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양선이 자주 조선의 앞 바다에 보이곤 했습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통상수교를 거부하면서 2번의 전쟁을 치르게됩니다. 첫 번째 전쟁은 천주교 신자들을 박했던 병인양요 때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가 죽게 됩니다. 병인박해를 빌미로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로 쳐들어옵니다. 이것이 병인양요이며 정족산성에서 양헌수, 김포의 문주산성에서 한성근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둡니다.

 

패배한 프랑스가 돌아가면서 우리의 문화재 외규장각을 약탈해 갑니다. 참고로 앞쪽 조선 문화에서 방병선 선생님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외유장각을 프랑스 박물관에서 찾아냈고 지금은 임대 형식으로 우리나라 전시가 되어 있습니다. 두번째 전쟁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으로 미국이 침략합니다. 제너럴셔먼호의 선원들이 평양 주민들을 납치하고 난폭한 행동으로 충돌을 일으킵니다. 이 과정에서 평양 군민이 사상자가 발생하고 이에 화가 난 평양 감사 박규수가 셔면호를 불태우고 선원들이 죽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이 강화도로 쳐들어오고 광성보 전투에서 어재연과 조선 군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패배하고 맙니다. 승리한 미국은 교섭을 요구하지만 거절당하고 돌아갑니다.

 

 

이때 미국은 전리품으로 어재현의 깃발을 가져갔고 임재 방식으로 강화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사건으로 당시 통상 수교를 거부한 흥선대원군을 협박하기 위해 독일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겪은 흥선대원군은 더욱 쇄국정책을 강화하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웁니다. 척화비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매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을 주장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적혀있습니다.

 

개항기를 주도 했던 흥선대원군의 대내정책은 왕권강화를 위해 양반들의 반발을 샀지만 민생 안정을 위해서 많은 정책을 실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외정책으로는 병인, 신미양요, 오베르 사건을 겪으면서 쇄국 정치를 펴고 새로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버니 묘까지 처참하게 파헤쳐 졌으니 이해는 되지만 이렇게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미래가 아닌 과거를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