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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국가는 왕위 세습과 율령반포, 불교를 믿으면서 왕권이 강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고대 국가의 고구려와 연맹왕국의 고구려는 나라 이름이 같은데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1. 고대 국가 고구려
연맹 왕국의 고구려는 군장들에 의해 뽑힌 왕들은 왕권이 악했지만 고대국가의 고구려는 왕은 세습으로 이루어지고 중앙 집권화가 되어 왕권이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고구려는 부여 출신인 주몽이 세웠으며 동명성왕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고국천왕은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은 왕입니다. 왕의 부자 세습과 55 부족 연맹체에서 행정 5부로5 편입시켰습니다. 또한 정부에서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추수하여 갚는 제도로 진대법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왕권을 강화할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과 인접해 있던 고의 근초고왕의 침략으로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전사하면서 4세기에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렇게 위기에 놓인 고구려를 소수림왕의 변화를 동해 다시 힘을 얻게 됩니다. 소수림왕은 고대국가의 기틀인 율령을 반포하고 고등 종교인 불교를 수용하고 유교를 가르치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교인 태학을 만듭니다. 이러한 소수림왕의 노력이 성공하면서 고구려의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바로 전성기 왕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연호가 영락인 광개토태왕입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려는 항상 중국의 간섭과 침략으로 항상 대비를 해야 했습니다. 동천왕 때 위나라의 침략으로 위기를 맞게 되지만 소금장수 출신인 미천왕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낙랑군과 대방군을 쫓아내고 요동의 서안평 지역을 점령합니다. 이런 와중에 백제광개토태왕은 영토 확장에 힘씁니다. 요동을 장악하고 왜의 침략으로 힘들어진 신라 내물왕의 청으로 광개토태왕이 도움을 줍니다. 도망가는 왜를 쫓아 금관가야까지 가게 되고 그로 인해 금관가야는 피해를 입어 쇠퇴하게 됩니다.
이번 일로 영향력이 강해진 고구려는 신라를 내정간섭을 하게 됩니다. 광개토태왕의 뒤를 아들인 장수왕이 잇습니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6m가 넘는 광개토태왕릉비를 세웁니다. 장수왕은 남하정책을 시도하기 위해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합니다. 또한 장수왕은 고국천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은 전사하고 충주 고구려비를 세웁니다.
그리고 힘이 약해진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해 나제동맹을 맺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전성기를 계속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분열되 있던 중국을 수왕조가 통일을 하고 고구려를 침략하지만 잘 알고 있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에서 패하고 수는 멸망하고 뒤를 당나라가 잇습니다. 고구려는 당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천리장성을 쌓고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이 등장합니다. 예상대로 당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하고 안시성 결투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나당연합에 의해 700년의 역사를 갖춘 군사 강국의 고구려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2. 고대 국가 백제 문화 강국 곡창 지대 풍요롭다
고대 국가 백제는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아들 온조가 세우고 비류는 지금의 인천 비추홀에 정착을 하지만 후에 온조 세력 쪽으로 합치게 됩니다. 고구려의 변화를 시도한 소수림왕이 있듯이 백제에는 고이왕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관등, 관복과 같은 율령을 반포하고 마한의 목지국을 병합하게 됩니다. 이 개혁은 성공하고 백제는 탄탄하게 힘을 쌓았습니다. 마침내 백제의 전성기를 만든 근초고왕이 등장합니다.
근초고왕은 요서 지역과 칠지도가 발견된 일본 규슈 지역으로 진출하며 마한지역을 병합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켜서 고구려를 위기에 맞게 합니다. 침류왕때는 중국 동진에서 불교를 수용합니다. 정복과 율령과 불교 수용을 다 갖춘 백제의 전성기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신라와 힘을 합치기 위해 나제동맹을 맺습니다. 하지만 장수왕에 의해 한성이 함락되고 백제의 대표하는 문화재인 무령왕릉이 있는 지금의 공주 웅진으로 천도합니다. 백제는 중국 남조와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무령왕릉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무령왕의 무덤이 중국식의 벽돌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고 일본에서만 자라는 나무 금송을 관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무령왕이 다시 제도 정비로 안정기로 접어듭니다.
백제의 중흥을 위해서 성왕은 지금의 부여인 사비로 천도하고 행정구역을 5부 5방으로 바꿉니다. 성왕은 신라의 진흥왕과 힘을 합쳐 다시 한강을 되찾지만 한강을 차지하고 싶은 진흥왕의 배신으로 백제와 신라의 관산성 전투가 벌어지고 안타깝게도 성왕은 사망하게 됩니다. 이로써 나제동맹은 이제 끝납니다. 선화공주의 일화로 잘 알려진 무왕이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하지만 삼천궁녀로 잘 아려진 무왕의 아들 의자왕 642년 신라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대야성 전투에서 승리로 신라는 위기 맞습니다.
하지만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연합으로 백제는 힘을 잃고 맙니다. 그 유명한 황산벌 전투의 패배로 660년 문화강국의 백제는 멸망합니다. 백제가 멸망 후 백제부흥을 위한 노력을 볼 수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흑치상지, 도침, 복신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교류가 활발했던 일본이 백제부흥을 도왔다고 합니다.
3. 고대 국가 신라
고대 국가 중에 마지막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신라 알아보겠습니다. 신라는 박혁거세가 사로국을 세웁니다. 신라 초기에는 왕 중심이 아닌 박씨, 석씨, 김 씨가 돌아가면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내물왕(내물 마립간) 시절 왜의 침략으로 고구려 광개토태왕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왜를 물리칩니다. 그 후 고구려의 내정 간섭이 이루어지고 김 씨들이 세습이 이루어지고 장수왕의 압박으로 나제동맹을 체결합니다.
고구려나 백제에서 제도정비를 통해 전성기를 누렸듯이 백제에서도 지증왕이 그 역할을 합니다. 왕의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신라이름이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신라 장군 이사부에 이 헤 지금의 독도 우산국을 정복합니다. 이러한 변화를 한층더 확장시킨 왕은 바로 법흥왕입니다. 황제국만 사용하는 연호를 법흥왕이 건원이라고 사용하게 됩니다.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율령을 도입하고 17관등으로 나눕니다. 국방부인 병부설치, 신분제도인 골품제를 정비합니다. 변화의 마지막 불교를 수용하는데 신하들의 반대로 쉽지는 않았습니다.
신라의 불교는 그 유명한 이차돈의 희생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광개토태왕에 의해 쇠퇴하고 있던 금관가야를 법흥왕이 정복합니다. 지증왕과 법흥왕의 개혁을 발판으로 이제 신라의 전성기를 누리는데 바로 진흥왕 때입니다. 진흥왕은 백제의 성왕과 동맹으로 백제가 차지한 한강을 배신으로 한강을 차지합니다.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단양적성비와 북한산의 순수비를 세웁니다. 신라 삼국통일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화랑도를 개편합니다.
당항성을 통해 중국과 교역이 이루어지고 대가야를 정복합니다. 이렇게 진흥왕에 의해 신라의 전성기를 펼첬습니다.. 나중에 무열왕이 된 김춘추, 나당연합으로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의 아들 문무왕이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킵니다. 하지만 당나라의 욕심으로 나당 전쟁이 일어나고 매소성과 기벌포에서의 승리로 신라는 당나라를 몰아냅니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는 주인공이 됩니다. 이제부터 통일신라시대가 시작됩니다.
4. 연맹 국가 가야
가야는 알에서 태어난 걸로 전해진 김수로가 건립하고 철 생산지로 잘 알려진 나라입니다. 지금의 김해는 금관가야, 고령은 대가야입니다. 가야 연맹을 주도하던 금관가야는 왜의 침략으로 신라를 도와주던 광개토태왕이 왜를 쫓아내는 과정에서 금관가야에 피해를 주게 됩니다. 그로 인해 가야 연맹의 주도권은 대가야로 넘어가게 됩니다. 힘이 약해진 금관가야는 6C 법흥왕에 의해서, 대가야는 진흥왕에 의해서 멸망하게 됩니다.
조그만한 한반도 땅에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연맹 국가 가야가 서로 나라를 차자하겠다고 싸우는 과정에서 피해도 많이 보았지만 그로인해 삼국이 통일되고 문화가 발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