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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지금 우리들이 교육과 많이 다를까요? 불교, 역사, 인쇄 문화를 통해 고려인들의 모습을 알아보겠습니다.
1. 고려의 교육 문화
고려의 문화 교육 부분을 알아보겠습니다. 유학 사상이 깃 드려 있습니다. 호족이 세력을 잡고 교육을 위해 광종 때 중앙에는 국자감과 지방에는 향교를 만듭니다. 과거시험으로는 명경과, 저술과, 잡과 그리고 승과가 시행되었으며 항상 전쟁이 많았던 관계로 무과는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과거제가 시행되면서 지위를 높일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고 사학 12도라는 사립학교가 생기게 됩니다. 지금의 쪽집게 과외처럼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변함이 없는 거 같습니다. 사학 12도가 너무 성행되다보니 나라에서 관학 진흥책이라고 장학제도인 양현고와 훌륭한 선생님을 모시는 전문 7재를 만들지만 소용없었다고 합니다. 믿기 어렵지만 고려의 사교육이 지금처럼 치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유학의 관심은 낮아지고 원나라의 간섭이 심했던 후기에는 성리학이 보급되게 됩니다. 이시기 성리학으로 알려진 학자들은 대표적으로 정도전, 정몽주, 이색, 이제현 등이 있습니다.
2. 불교문화
고려는 불교의 왕국이라고 할 수 있으며 태조의 훈요 10조에 의해 불교 행사인 연등회와 도교 행사인 팔관회가 큰 행사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광종때는 불교를 많이 알기 위해 균여가 향가로서 보현심원가를 만듭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 불교의 문화가 많이 발달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성종 때 유학자인 최승로의 시무 28조에 건의 한 것처럼 사치스러운 연등회를 줄이고, 팔관회는 폐지됩니다. 고려의 중기에는 왕자이자 승려인 의천, 그는 천태종의 창시자입니다. 천태종은 교종 중심의 교종과 선종의 통합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의천의 사망한 후 다시 교종과 선종은 분리 됐다고 합니다. 의천과 쌍벽을 누리는 지눌이 등장합니다. 지눌은 선교 중심의 선교 통합한 조계종을 창시합니다. 교종과 선종 중에 어떤 것이 먼저냐 이지만 의천과 지눌의 통합하려는 의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눌의 제자 혜심은 유교와 불교는 일치하는 것이 많다고 하며 유불일치 설을 주장합니다. 지금도 풍수지리설을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습니다. 고려 당시엔 풍수지리설이 성행하지는 않았지만 서경길지설로 묘청이 풍주지리를 빌미로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기려는 시도를 하지만 개경파들의 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지금의 서울인 남경기지설이 나오는데 후에 조선의 한양 천도의 배경이 됩니다.
3. 역사문화
삼국사기는 김부식에 의해 지어졌으며 고려 실록이나 구 삼국사를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삼국사기는 우리나라 현존 역사서중 최고 오래된 역사서이며 왕과 신하에 관한 방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무신정권 때의 역사서로는 각훈의 해동고승전, 과거를 4수했던 이규보의 동명왕 편이 있습니다. 동명왕편을 보면 당시 사상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식의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후기에는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로 민간설화의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 신진사대부의 이제현의 사략이 있습니다.
4. 고려 불상, 회화, 불탑, 인쇄 문화
고려는 불교의 나라로 초기에는 불상은 철불이 유행사고 대형 석불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상 입상, 안동 이천 마애 여래 입상, 파주 용미리 마애 이블 입상이 있습니다. 고려의 불상은 지방 호족의 지방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기에는 영주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으로 신라의 계승을 보여주는 석상입니다. 후기에는 지배층 소원을 들어주는 불화로 아미타래영도, 수월관음도가 있습니다. 고구려의 수렵도와 같은 천산대렵도가 있습니다. 불탑에는 여주고달사지승탑, 충주 정토사지흥법국사승탑, 다각다층의 모양으로 만들어진 월정사 8각 9층석탑, 후기에는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개성경천사지 10층 석탑이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나라는 탑을 홀수 층으로 짓고 재료는 화강암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10층이고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구한말에 일본인들이 이 탑을 해체해서 일본으로 가져간 것을 1918년에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됐다고 합니다. 끊임없는 왜의 침략에도 이렇게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현존함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려의 대표적인 공예로는 나전칠기와 순청자와 후기에 상감청자가 있습니다. 인쇄 문화에는 목판과 활판으로 나뉘는데 목판은 대량으로 찍어 낼 수 있지만 한번 새긴 것은 고치기가 힘들어 다양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고려의 대표적인 목판 인쇄물은 초조대장경과 팔만대장경이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금속 활판은 다양성은 있지만 대량으로 찍어내기는 힘든 단점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쇄물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으로 직지심체요절이 있습니다. 직지심체요절은 고 박병선 박사가 병인양요때 프랑스의 약탈로 빼앗긴 우리의 문화유산을 찾겠다는 목표로 프랑스로 유학을 가고 프랑스 국립박물관에서 일하다 찾아내고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본 보다 더 오래된 것을 밝혔다고 합니다. 외규장각 의궤도 찾아냈으며 말도 안 되지만 지금은 우리나라에 임대형식으로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고려의 교육도 지금과 다를 것이 없는 걸 알았습니다. 지금의 사교육이 고려때부터 시작 되지 않았을까요? 고려는 불교를 장려하는 나라로 불교 문화가 많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으며 우리의 문화재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신 박병선 선생님의 이야기는 정말로 감동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