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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문신들의 부정부패로 무신들이 정권을 잡습니다. 그들은 고려를 어떻게 이끌어 갈까요? 문신들과는 다를까요? 그리고 고려의 경제 생활과 사회 생활을 통해 당시 모습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고려 후기 (무신정변)
고려 후기 무신정변의 대표적인 인물은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최우 순으로 이어집니다. 당시 왕은 의종입니다. 무신들의 군사기구로는 이의방부터 이의민까지는 중방을 운영하고 최충헌부터는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본인이 최고자리 별감을 맡습니다. 아들 최우는 인사권을 장악할 수 있는 정방을 설치하고, 서방을 설치하여 문신들도 등용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병기구로는 경대승은 도방을 만들고 최우는 삼별초의 배경이 될 수 있는 야별초를 만듭니다. 결국 무신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힘으로만 지키려고 하는 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서경에서는 조위총, 개경에서는 김보당이 저항했으며 특이하게 이들은 모두 귀족출신들입니다.
그리고 공주의 특수 행정 구역인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의 난이 일어납니다. 경상도 쪽 운문과 초전에서 김사미, 효심의 난도 일어납니다. 이들인 양민들입니다. 그리고 최충헌의 사노비인 만적이 난을 일으킵니다. 만적은 왕후장상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겠는가? 라며 신분해방을 주장합니다.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당시 노비가 이런 생각을 하고 행동에 옮긴 것은 대단히 혁신적인 일이라 할 수 있고 당시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문신정권의 행포를 못 참은 무신들이 정권을 잡았지만 권력을 잡은 무신들 또한 그들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미래가 없는 시대에 더 밝은 미래를 위해 귀족부터 천민, 노비까지 개혁을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2. 고려의 경제생활
고려의 경제생활을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토지제도에는 수조권과 소유권이 있습니다. 수조권은 태조 왕건 때 역분전으로 개국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토지이며, 경종 때 시행했던 시정전시과로 하는 일에 따라 지급되는 제도입니다. 시정전시과는 전,현직 관료들에게 지급되고 역분전의 문화가 남아있는 인품이 있었습니다. 목종 때 전, 현직에게 지급되지만 인품에게는 지급되지 않는 개정전시과를 시행합니다. 좀 더 왕권이 강화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문종 때는 오직 현직에게만 지급되는 경정전시과를 시행합니다.
이런 이유는 모두에게 토지와 산의 지급으로 인한 부족으로 일한 사람들에게만 지급하게 된 것입니다. 소유권에는 백성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 관리의 전시과가 설정되어 있어서 수확한 생산 일부를 정부가 아닌 관리에게 내는 민전이 있습니다. 수취제도의 양안은 조세로 토지세가 있고, 특산물을 내는 공납, 국가에 요역과 군역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호적이 있습니다. 고려 토지제도의 중요한 점은 초기에 역분제에서 전시과로 바뀌는 과정이 중요하니 꼭 알아두세요. 경제활동으로는 고려 후기에 논농사는 이앙법이 일부 지역에서는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고려시대의 농업에 관련된 농상집요가 있습니다. 밭농사로는 2년 3작으로 균작법과 문익점에 의해 들어온 목화를 재배하기 시작합니다. 목화는 정말 4계절을 삼베만 입던 우리 백성들의 삶을 좀 더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상업으로는 고려의 국제무역항이 개성과 가까운 예성강에 벽란도가 있습니다. 벽란도에 오던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고려를 외국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노걸대라는 중국 회화책이 있었다고 합니다.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화폐가 필요했는데 은병인 활구는 고액 화폐였으며, 일반적으로 사용된 화폐는 성종 때 만든 건원중보, 숙종 때 만든 해동통보가 있습니다.
하지만 상인들은 화폐보다는 쌀이나 옷감 같은 현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관영상점으로 서적점과 지금의 커피숍 같은 다점과 시전이 운영되었습니다. 시전이나 상행위를 관리, 감도 하는 경시성도 있습니다. 또한 상평창에서는 물가를 조절했다고 합니다. 고려 초에는 관영수공업과 소 수공업이 운영되다가 민영수공업과 사원 수공업이 생겨납니다.
3. 고려의 사회생활
고려의 신분은 귀족, 중류층, 앙민, 천민으로 나뉩니다. 중류층에는 하급관리와 잡류, 암반, 군반, 향리가 속해있습니다. 양민에는 조선의 백정과 달리 고려의 백정은 일반 농민을 말합니다. 향, 부곡, 소에서는 일반 백성들보다 세금을 많이 내야 하고 거주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차별로 망이망소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노비인 천민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미국의 노예제도처럼 노비는 사유재산이며 매매, 상속, 증여가 가능했습니다.
고려 초기에는 불교 신앙 조직으로 매향 활동을 했던 향도는 후기에는 마을 공동조직으로 변했습니다. 빈민 구휼제도로는 흑창으로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수학하면 갚는 제도이고 나중에는 의창을 바뀝니다. 그리고 제위 보라고 돈을 모으면 이자가 발생하는데 그 이자로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의원인 동서대비원과 약방 같은 혜민국, 어려운 일이나 급한일을 도와주는 구제도감, 구급도감의 운영으로 백성들을 위해 어느 정도 나라다운 나라를 꾸려 나가고 있었습니다. 법으로는 당나라에서 들어온 당륭이 있었지만 각 지방별로 대대로 내려온 관습법을 따랐습니다.
고려는 지금과 반대로 가정 내에 여성의 지위가 높았습니다. 예로 남녀 균등상속과 아들, 딸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냈으며 외가음서와 호적엔 나이순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남녀가 평등한 시기로 보입니다. 이러한 풍습은 조선 전기까지 이어지고 그 후의 가부장적인 유교사상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유교사상이 아닌 고려의 남녀평등이 지금까지 전해줬더라면 지금은 어떤 세상이 되었을까요? 아마도 지금보다는 더 좋은 대한민국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고려 후기 정권을 잡은 무신들도 문신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권력만을 지키려는 행위로 힘들어지는건 백성들 뿐입니다. 백성들인 저항해보지만 실패로 끝나고 그것은 작은 씨앗이 되어 훗날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