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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고려를 어떻게 꾸려 나갈까요. 고려 전기와 중기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려 중기 묘청의 난은 왜 일어났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왕건,시무28조썸네일

 

1. 고려 전기

고려는 918년 500년 역사가 시작됩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민생안정을 위해서 세금을 1/10을 깎아 주는 감세와 고구려의 진대법과 같은 흑창을 시행합니다. 그리고 왕권이 약했던 왕건은 호족들과 결혼 정책을 펼치며 그로 인해 부인이 29명이라고 합니다. 왕씨 성을 주는 사성제도를 실시합니다.

 

그리고 개국 공신들에게 역할에 따라 토지를 주는 제도로 역분전이 있습니다. 반면 연대책임을 지게 하는 사심관제도를 시행했습니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왕건은 북진 정책을 펼칩니다. 그래서 발해 유민들을 수용하고 청천강에서 영흥까지 영토를 확장합니다. 왕건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정치할 때 유의할 점을 적어놓은 정계, 관리들이 해야 할 것들을 적어놓은 계백료서, 자녀가 많은 왕건은 아들들의 왕위 다툼을 염려하여 유언을 담고 있는 훈요 10조를 남겼습니다. 태조가 죽고 혜종을 왕위에 오르지만 그것을 못마땅해하는 태조의 장인인 왕규가 모반을 도모하는데 이것을 왕규의 난이라고 합니다. 두 번에 걸쳐 혜종 살해를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합니다. 왕규의 난은 요와 왕식렴에 의해 정리됩니다.

 

 

고려왕조의 기틀을 세운 왕은 고려 4대왕 광종입니다. 광종의 노비안검법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원래 신분으로 되돌리는 제도입니다. 노비는 호족들의 사유재산이고 군사력 강화를 억제하기 위해서입니다. 개국공신이라도 과거를 봐야 하는 과거제를 시행합니다. 이 제도는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반발하는 호족들을 역모 죄로 처벌했다고 합니다. 광종은 자신이 황제임을 밝히는 칭제건원을 선포하고 광덕이라는 연호를 사용합니다. 이렇게 왕권이 강화되고 왕권을 이어받은 경종은 지금의 월급과 같은 시정전시과를 실시합니다.

 

이러한 제도 정비를 통해 호족의 힘은 약해지고 왕권강화를 이루었습니다. 이어서 성종의 시대. 6두품이며 유학자인 최승로는 정치 개혁을 28개로 나누어 만든 시무 28조를 성종에게 올리고 그것들을 많이 수용했다고 합니다. 중앙은 2성 6부, 지방은 12목으로 나누어 체계화시켰습니다. 2성 6부를 비롯해 중추원, 어사대, 삼사는 당과 송의 영향을 받았지만 고려의 독자적인 기구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2품 이상의 관료들이 모여 회의하는 재추회의입니다. 계속되는 외침으로 국경지역의 병사들을 관리하는 지방관들을 관리, 지시하는 회의 체계로 도병마사라고도 불립니다.

 

그리고 3품 이하의 낭사와 어사대를 대간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하는 일은 서경(서명하는 것), 간쟁, 봉박(편지를 다시 봉하는 것)으로 강력한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로 언론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지방 12목은 5도와 양계로 지방관이 파견되었습니다. 양계란 북쪽으로는 거란과 여진이 수시로 공격하고 동쪽으로는 왜가 공격하니 양쪽의 국경지역을 관리하는 지방관인 병마사를 파견하고 5도에는 안찰사를 파견합니다.

 

하지만 속군, 속현, 향, 부곡 ,소는 지방 관리를 파견하지 않고 실질적인 지배 세력인 향리가 관리합니다. 그리고 불교 행사인 연등회는 줄이고 도교 행사인 팔관회는 금지하라고 건의합니다.. 본격적인 유교사상이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마침내 이러한 정책들이 문벌귀족사회의 토대가 됩니다. 이렇게 체계화가 되어가면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고려 중기

고려 전기에서 중기로 가면서 안정화가 되어갑니다. 그러면서 변화들이 생기는데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초기의 지배 세력이 호족이었다면 중기에는 문벌귀족으로 바뀌게 됩니다. 문벌귀족들은 5품 이상의 사람들이고 그들만의 특권을 누립니다. 과거시험을 안 봐도 되는 음서제, 태어나면 토지를 지급받는 공음전, 그리고 자신들이 권력을 움켜잡기 위해 폐쇄적인 통혼, 심지어 근친혼을 통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갑니다. 사람들은 가지면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가지려는 욕심, 문벌귀족들은 어떻게 될까요? 이자겸의 난은 문벌귀족들이 폐단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자겸은 둘째 예정의 비, 셋째, 넷째는 인종의 비로 보냈으니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 됩니다.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지 않기 위해서 딸들을 왕비로 만드는 겁니다. 이자겸은 여기서 욕심을 멈추지 못하고 인종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려 합니다.. 그래서 척준경 와 함께 일을 도모하지만 실패합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정세를 틈타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이 등장합니다. 풍수지리가 성행했던 당시 묘청은 이것을 빌미로 나라를 부흥케 하려면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겨야 한다고 청합니다. 인종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일을 진행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천도를 찬성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개경파인 반대세력의 등장하고 묘청은 천도 계획이 실패하자 반란을 일으킵니다. 정부는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김부식을 보냅니다.

 

1년 넘는 항전으로 식량은 부족하고 사기는 떨어지면서 반란은 진압됩니다. 여기서 등장한 김부식은 천도 반대파의 대표적인 인물이고 유학자로 삼국사기를 편찬합니다. 서경파와 개경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서경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묘청과 정지상이고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하고 불교와 풍수지리 영향을 받고 금정벌을 주장합니다. 개경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김부식이고 신라를 계승한 사대주로 유교의 영향을 받고 금사대주의를 주장합니다. 문벌귀족의 모순된 사건은 계속 이어집니다.

 

김부식의 어린 아들 김돈중은 잘 나가는 아버지를 등에 업고 무례하게 나이 많은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웁니다. 이에 정중부는 김돈중을 혼내주는데 이 일로 김부식은 다시 정중부를 압박합니다. 또 젊은 문신 한뢰가 나이 많은 무신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얼마 뒤 한뢰는 철퇴를 맞고 사망합니다. 이렇게 무분별한 문신들의 행태에 분노한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키는데 바로 무신정변입니다.

 

고려를 건국은 왕건은 고려 전기에 왕권강화를 위해 시스템을 정비하고 그 후의 여러 왕들이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행정 조직들이 체계화가 되고 안정기로 들어서면서 고려 중기에는 문벌귀족들의 부조리로 무신정권이 권력을 잡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