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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은 어떻게 등장 했으며 새롭게 권력을 잡게된 세도정치가들이 조선에 끼치는 영향은 어떤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탕평책썸네일

 

1. 영조와 정조의 정책

선조와 광해군 시기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정권을 잡고, 지배 세력이 되기 위해 많은 인재들이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며 혼란한 시기를 겪게 됩니다. 이것을 붕당정치하고 하는데 영조 때 이런 붕당정치를 없애고 노론과 소론을 따지지 않고 인재들을 골고루 등용하겠다는 뜻으로 실시한 정책이 바로 탕평책입니다. 그리고 영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붕당을 인정하지 않은 완론탕평을 주장했습니다.

 

영조는 탕평정치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기 위해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웁니다. 탕평비의 내용은 신의가 있고 아첨하지 않는 것은 군자의 마음이요, 아첨하고 신의가 없음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영조는 송시열과 같은 산림을 인정하지 않고 인재 양성을 위한 역할을 못하는 서원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인사권으로 인해 힘을 가졌던 이조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개혁을 위해 속대전을 편찬합니다. 군대 가는 대신 1년에 2필을 내던 균역법을 1년에 1필만 내도록 합니다. 이렇게 세금 감면 정책으로 백성들의 삶을 살피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의 청계천 준설 작업을 실시합니다. 태종 이방원 때 시작했던 신문고를 부활시키고 사람의 생명을 중요시 여기며 삼 심제를 시행합니다. 영조의 명으로 동국문헌비고가 발행됩니다. 이 책은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종 제도를 13고로 분류해 순서대로 정리한 책이며 100권으로 조선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양의 책입니다. 이 작업은 정조 때까지 이어집니다.

 

 

후기에는 동국문헌비고에 더 많은 자료들을 첨가하여 1616이고로 분류하고 200권으로 된 증보문헌 비고 가 간행됩니다. 이 책들로 인해 조선의 많은 귀중한 자료들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손자인 정조는 준론탕평을 펼칩니다. 준론탕평이란 당을 인정해주고 논쟁이 생겼을 시 정조가 들어 보고 결정을 해주는 심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정조 초기에는 궁료 출신 홍국영이 세를 이어가지만 권력의 욕심으로 누이를 후궁으로 보고 완풍군을 후사로 세우려다 반대에 부딪쳐 더 이상 권력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정조의 다른 왕들과 다르게 규장각을 설치하고 정조가 직접 신하들을 계몽시키기기 위해 교육을 했다고 합니다.

 

영조 때 법전인 속대전을 이어 정조 때는 대전통편을 펴냅니다. 시전상인들의 특권으로 독점판매를 할 수 있었는데 정조는 이것을 폐지합니다. 특정한 사람에게 만이 아닌 누구나 장사를 할 수 있는 신해통공을 만듭니다. 그리고 지방의 권력층이라고 할 수 있는 향약을 중앙에서 파견한 수령이 감독하도록 하여 지방을 통제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동문휘고라는 대외관계를 정리하여 적어놓은 책을 발행합니다. 정조하면 떠오르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수원화성이 있습니다. 많은 전쟁과 자연재해로 손상된 수원화성을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역사의 기록을 남겨 놓은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자신이 계획하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지었으며 정약용의 거중기를 이용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당시 거중기의 사용은 많은 비용과 시간을 아꼈다고 합니다. 영조는 신하들보다 나이가 많았고 정조는 너무 똑똑하여 이러한 탕평 정책들을 펼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폐단이 생기는데요. 영조 때 왕과 혼인으로 생긴 탕평당이 생기고 이들은 영조 말기에는 권력 다툼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나랏일을 정조가 맡아서 하다 보니 정조가 죽은 후에는 그것을 이어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정조 이후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흘러갈까요?

 

2. 조선의 세도정치

세도정치는 세력이 커진 소수 가문의 외척들이 정치에 개입하여 이루어지는 형태입니다. 순조, 헌종, 철종에 걸쳐 세도정치가 이루어지며 주도 세력은 안동 김씨와 풍향 조 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비변사와 5군영을 장악하면 그들의 세력은 커지게 됩니다. 이시기의 폐단으로는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성행합니다. 그로 인해 전정, 군정, 빈민구휼제도인 환곡의 문제로 삼정의 문란해지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서로 정권을 잡기 위해 붕당정치를 이루고 세 번의 환곡을 거치던 시대도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세도정치는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이 중에서 독보적인 가문은 안동 김 씨입니다. 이 가문은 순조, 헌정, 철종 대까지 순원왕후, 효현왕후, 철인왕후 세 명의 왕후를 배출했으니 그 치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을 것입니다.

 

 

한명의 왕후를 배출하는 것도 가문의 영광인데 세 명이니 오죽했겠습니까? 그리고 헌종이 8세에 즉위하여 수렴청정은 시어머니인 순원왕후가 생존한 관계로 신원왕후는 못했습니다. 안동 김 씨가 세도정치를 시작해서 끝을 맺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세력은 신정왕후를 배출한 풍향 조 씨입니다.. 신정왕후는 헌종의 수렴청정은 못했지만 12세인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수렴청정을 합니다. 신정왕후는 왕권 강화와 왕실의 위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국정운영에 참여합니다. 그녀는 경복궁 중건과 종친들의 위상을 강화하고 여러 가지 폐단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은 붕당 정치로 인해 어지러운 조선을 바로 잡기 위해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왕권의 약화로 새로운 지배세력인 세도가들에 의해 조정은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