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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조선 건국과 함께 중앙 집권이 완성됩니다. 이 시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지배 세력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조선건국

조선건국 과정을 잠깐 들여다보면 신진사대부들은 고려 말 권문세족들과 부딪치게 됩니다. 신진사대부는 위화도회군과 과전법을 통해 권문세족들의 세력을 가져옵니다. 여기서 정도전이 이끈 급진 개혁파는 공양왕을 왕위에 오르고 과전법을 실시하면서 새로운 왕조를 만들기를 원했고 정몽주가 이끈 온건 개혁파는 고려의 왕조에서 점진적으로 개혁해 나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급진 개혁파는 뜻을 실행합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과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새로운 나라를 같이 하자고 제안을 하지만 두 왕을 섬길 수 없다고 한 정몽주를 처단합니다. 이렇게 권력을 잡은 신진사대부와 신흥무인세력의 대표적인 인물 이성계가 1392년 조선을 건국합니다. 이성계와 함께 성리학 사상으로 조선 건국에 큰 몫을 한 삼봉 정도전은 재상 중심의 정치를 하고자 했으며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과전법 실시 등을 통해 조선의 기틀을 잡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정도전의 저서로는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그리고 조선이 유교사상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불씨잡변이 있습니다.

2. 조선의 중앙집권 완성

이렇게 조선의 기틀을 만들어 가는데 이방원이 재상중심이 아닌 왕의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리겠다 하여 왕자의 난을 일으킵니다. 이때 정도전이 이방원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태종 이방원 바로 왕자의 난으로 왕위에 오릅니다. 태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6조에게 직접 명력을 내리는 6조 직계제, 사병을 없애게 하고 세금을 걷기 위해 양전사업을 실시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주민등록증 역할을 하는 호패법을 실시하고 신문고를 설치합니다. 호패법은 성인 남성에게만 주어졌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권력과 자신의 뒤를 잇을 아들이 안정적인 정치를 하게 하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태종은 첫쌔 양녕대군은 왕의 자질이 없다 하여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세종은 태종과 달리 재상들과 함께하는 정치를 하기 위해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하고 인재들을 등용하기 위해 집현전을 만듭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쉽게 글을 읽고 쓰게 할 수 있도록 훈민정음을 창제하셨습니다. 세종은 여진족을 정리하기 위해 4군에는 최윤덕, 6진을 정리하기 위해 김종서를 보내고 쓰시마 섬도 정벌합니다. 안정기에 있던 시기에 세종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체적으로 유교정치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세종의 손자 단종은 너무 어린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옆에서 돌봐주던 삼촌 수양대군이 왕위자리를 욕심내고 세조의 시대를 여는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한명회와 신숙주, 정인지는 함께 일을 도모합니다. 마침내 세조는 계유정난을 통해 왕위에 오릅니다. 세조는 왕권강화를 주장하고 태종대처럼 66조 직계제를 실시하고 집현전을 폐지합니다. 그리고 정치 질서를 위해 경국대전을 만들기 시작하고 직전법을 시행합니다. 이렇게 왕이 되기 위해 자신의 손에 피를 많이 본 세조는 벌을 받는 건지 불행하게도 말년에 자식, 며느리 등을 자신보다 먼저 하늘로 보내게 됩니다. 강력한 왕권 뒤에는 안정된 기시를 맞이하듯이 세조 다음 성종대에도 태평성대를 누리는 시기입니다. 성종은 경언, 서연을 담당하는 홍문관을 부활시키고 세조대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하고 국조오례의를 편찬합니다. 이로서 성종 때 중앙집권의 시스템을 완성합니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역사를 보면 강력한 왕권을 위해 많은 희생 뒤에는 평화로운 안정기 시대로 국가다운 모습을 만들어갑니다.

3.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 - 사화

성종은 기득권이었던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 등 사림파를 등용하게 됩니다. 사림파는 훈구 대신들의 비행을 폭로하고 규탄하면서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으로 인해 사화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무오사화는 성종실록 편찬 과정에서 사림파인 김일손 사초에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다는 내용으로 해석하고 연산군은 훈구파의 부채질에 싫어했던 사림파를 숙청하는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림파 학자들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갑자사화는 당시 왕인 폐비 윤 씨의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이 관련된 신하들을 처참하게 죽이게 됩니다. 연산군의 폭정은 하늘을 찌르게 되고 갑자사회를 계기로 중종반정이 일어납니다. 다음은 기묘사화는 중종때 일어납니다. 중종의 신임을 얻고 있는 조광조 너무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여 훈구파에게 반감을 사고 있던 중 위훈삭제를 주장합니다. 위훈삭제란 중종반정 때 공신이 아닌데 공신 명단에 올라 있는 사람들을 삭제하는 것입니다. 그 명단에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훈구 공신들의 아들, 동생 등이 올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단에서 삭제되면 직위는 삭탈되고 전답과 노비 등 재산을 몰수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조격서 폐지와 사림의 등용을 위한 현량과 실시를 주장합니다. 이렇게 훈구파의 정면으로 맞서는 조광조는 훈구파의 계략인 나뭇잎에 새겨진 주초위왕, 즉 조씨 성을 가진 자가 왕이 된다.라는. 글 때문에 죽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명종 때 을사사화는 소윤과 대윤의 대립으로 윤형원 등의 외척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사림파들은 많은 화를 당하지만 유향소, 서원, 향약을 통해 사림파는 권력을 잡게 됩니다. 나라를 위해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하는데 자신들의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서 정치를 했으니 백성들의 삺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조건 건국과 함께 신진 사대부들은 왕권강화를 위해 중앙 집권을 완성하고 그 과정에서 있을 수 었는 왕자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나라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자신들의 권세와 정치적 이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희생 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