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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붕당정치로 인해 권력이 나뉘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성공할까요? 상복을 입는 기간이 왜 중요한지? 이모든 것들이 왜 이러나게 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조선 후기 붕당정치

조선 후기 붕당정치는 어떻게 나라를 이끌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조선 초부터 권력을 잡았던 훈구파는 4번의 사화를 통해 사림파들의 많은 피를 보았지만 선조 때 훈구파의 견제를 위해 사림들을 등용하면서 훈구파는 밀려납니다. 성리학의 이념으로 뭉쳐서 나라를 바로 잡으려던 사림파,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세력이 강해진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이리하여 본격적인 붕당정치가 시작됩니다. 당시 훈구파의 청산과 삼사인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의 전랑의 자리를 놓고 김효원을 따르는 사람들은 동인, 심의겸을 따르는 사람들은 서인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또 정여립의 반란과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정철의 건의에 선조는 정철을 밀어내고 정철의 처벌을 놓고 동인은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나뉩니다.

 

 

2. 광해군의 중립외교

광해군은 오랜 세자의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조선 15대 왕이 됩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발생 시 직접 전쟁에 참여합니다. 선조가 피신을 가던 중 세자로 책봉하고 전쟁터로 내몰립니다. 광해군은 북쪽지역의 민심을 수습과 군을 통솔하며 조선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이번엔 정유재란 때는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지켰습니다.

 

그렇게 전쟁은 끝나고 선조의 마음은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기를 원했습니다. 광해군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하지만 선조는 서거하고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광해군이 30살이 넘어서야 왕이 됩니다. 광해군하면 중립외교정책을 손꼽습니다.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 당시 후금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광해군에게 원군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우리 병사들의 피해를 줄이며 상황을 봐서 후금에 투항하라고 밀지를 내립니다.

 

하지만 명을 섬기던 조선은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명목과 백성을 위한 대동법으로 반감을 사게 됩니다. 광해군은 어린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킵니다.. 이일로 반감을 산 서인들을 중심으로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광해군은 폐위됩니다. 이렇게 해서 넘은 세력은 서인과 남인이 있습니다.

 

 

3. 상복 얼마나 입어야 하나? 예송논쟁

예송 논쟁은 왕이 죽었을 때 어머니인 대비가 상복을 얼마동안 입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쟁을 하는 것입니다. 예송논쟁은 학문적인 논쟁이면서 정치적으로 서인과 남인의 권력 쟁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효종의 죽음으로 그의 어머니 조대비가 상복 입는 기간을 두고 벌어진 논쟁입니다. 서인은 조대비의 아들이니 성리학의 예법에 따라서 상복을 1년 입어야 한다고 했고 남인은 효종이 차남이지만 왕이니 3년 동안 사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법에는 장자는 3년, 차남 이하는 1년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논쟁이 벌이지는 것입니다. 결과는 서인이 주장한 대로 1년 동안 상복을 입기로 하였으며 서인이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그 후 또 한 번의 논쟁.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가 죽자 시어머니인 조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쟁이 벌어집니다. 이번엔 조대비의 며느리네요. 예법에는 첫째 며느리는 1년, 둘째 며느리는 9개월 동안 예를 치르는 걸로 나와 있습니다. 똑같은 아들, 며느리인데 왜 이렇게 차이를 두었는지?  서인은 인선왕후가 둘째 며느리니 9개월, 남인은 왕후이니 1년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번엔 어떻게 했을까요?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대로 상복을 1년 동안 입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번에 남인들이 권력을 잡게 됩니다. 이리하여 이황을 계승한 남인과 이이를 계승한 서인의 대립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번의 예송 논쟁은 예법을 지키려는 논쟁이 아닌 권력을 서로 잡으려는 정치적 논쟁을 볼 수밖에 없네요.

 

 

4. 정권 교체

환국은 지배 세력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서인과 남인의 붕당정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숙종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왕권강화를 위해 지배 세력을 교체하는데 환국은 세 번에 걸쳐 일어납니다. 숙종6년 경신환국은 서인, 숙종 15년 기사환국은 남인, 숙종 20년 갑술환국은 서인이 세력을 잡습니다. 갑술환국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희빈을 왕후까지 올리지만 왕후답지 못한 행동으로 사약을 받고 인현왕후를 복귀시키는 사건입니다.

 

 

몇 년 사이에 이렇게 정권이 바뀌면 힘든 건 백성이 아닐까 합니다.. 이때 정권을 잡은 서인은 후에 소론과 노론을 나눠집니다. 정권을 잡은 서인은 남인의 처벌을 놓고 강경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노론과 온건하게 해야 한다는 소론으로 의견이 갈라지게 됩니다. 소론의 온건한 처벌은 나중에 남인이 정권을 잡았을 경우 복수가 있을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입니다.

 

조선 후기 붕당정치와 예송논쟁은 모두가 서로 권력을 갖기 위한 욕심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관료들이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들의 권세를 위해서 이 모든 일들이 이러나고 많은 희생자들이 새긴것에 안타까운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