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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외교와 조직은 변화를 알아보고 더 강해진 후금과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방어를 위해 중앙군과 지방군의 조직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조선 후기 외교 후금, 일본

여진이 힘이 강해져 조선 후기에는 후금을 세우게 됩니다. 후금의 세력이 강해지고 광해군의 중립외교로 관계를 개선하려 하지만 이일을 계기로 폐위됩니다. 중립외교에서 중대한 책임을 맡았던 강홍림도 기억해야 합니다. 양란이 끝나고 일본에 새로운 정권인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일본의 화해 요청으로 광해군과 기유약조를 맺고 일본과 외교를 다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파하기 위해 통신사를 보냅니다. 참고로 개항 이후의 사절단인 수신사는 일본으로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 조선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서 인조반정을 인조가 왕위에 오르고 친명배금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후금이 힘이 강해지면서 조선을 침략합니다. 첫 번째 침략은 정묘호란입니다. 많은 의병들의 활약으로 형제의 관계를 맺고 후금은 돌아갑니다. 후금은 청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두 번째 침략을 하는데 그것이 병자호란입니다. 이 때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지만 45일 만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됩니다. 그 유명한 삼전도의 굴욕이 여기서 나오게 됩니다. 조선의 왕 인조가 청 태종에게 머리를 땅바닥에 9번을 박아 절을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굴욕적인 사건입니다. 이로인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수만은 조선의 백성들이 이질로 끌려갑니다. 인지로 끌려갔던 봉림대군이 효종이 되어 불벌정책을 펼치지만 뜻을 펼치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숙종은 청과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조선과 청의 경계를 정했습니다. 비석의 내용은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고 해서 서쪽으로는 압록, 동쪽으로는 토문을 경계로 한다.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일본과 끈임 없는 논쟁을 하고 있는 독도문제를 안용복이 해결합니다.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이고 조업권과 영유권이 조선에 있음을 일본으로부터 인정하게 합니다. 지금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셨으니 정말로 대단한 인물입니다. 이렇게 증거들로 독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자료로 쓰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안용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경상북도 울릉군 북면에 2013년에 안용복기념관이 건립되었습니다. 안용복기념관은 연중무휴이며 무료로 관람이 가능합니다. 정조 때 와서는 북학론을 주장합니다. 조선보다 문물이 앞서 있는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고 대표적인 인물은 박지원, 박제가 등이 있습니다.

 

 

 

2. 조선 후기 조직

조선 후기 양난 이후 여러 분야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외교 분야에서는 비변사의 기능이 더 강해지면서 국정 최고 기관이 되고 의정부 6조의 기능은 약화됩니다. 비변사의 기능은 후기 세도정치 때 그 세력은 절정에 다다르게 됩니다. 하지만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됩니다. 조선의 중앙군 5위 체제가 임진왜란 후에는 5군영 체제로 바뀝니다. 구성은 훈련도감, 어영청, 수어청, 총융청과 금위영으로 이루어집니다. 훈련도감은 포수, 사수, 살수로 구성되며 삼수병이라 하고 삼수미를 세금으로 거둬 경비를 충당했습니다. 삼수병은 징집제가 아닌 모병제로 직업군인을 생각하면 됩니다. 조총으로 피해를 많이 봤던 조선은 포수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어영청, 수어청, 총융청은 호란을 겪으면서 인조 때 만들어졌고 금위영은 숙종 때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하여 5군영이 완성됩니다. 지방군은 양반에서 노비까지 모든 신분이 포함된 속오군으로 구성되며 지역 방어차원에서 중앙군처럼 상비군 체제가 아닌 예비군 체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조선 후기 사회 변화

양난 이후 양안과 호적이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어 세금을 걷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금을 걷을 수 없으니 국자 운영이 힘들어지겠죠. 해결방법으로 납속책을 만들게 됩니다. 납속책이란 세금을 납부하면 임명장을 주는 제도로 대표적으로 공명첩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의 발달로 양반이 아니지만 재산을 많이 모으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돈을 주고 공식적으로 양반 신분을 사는 거죠. 공명첩으로 양반이 되면 군역에서 면제를 받게 되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이리하여 양반의 수는 증가하고 상민과 노비의 수는 줄어드는 현상이 생기면서 신분제도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양반은 권반, 향반, 잔반으로 나뉘고 중인은 서얼과 기술직 중인들로 나뉩니다. 이중에 서얼들은 차별을 문제 삼아 신분상승상소를 올리게 되고 정조 때에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어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제가, 유득공 등이 있습니다. 상민은 부농과 임노동자로 분류됩니다. 부농들은 몰락한 양반인 잔반들의 족보를 사서 양반이 되고 양반의 특권인 납속책을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이시기에 양반의 수가 증가합니다. 그 결과 세금을 내는 양인의수가 줄어들어 재정 확보가 힘들어지니 양인의 수를 늘리기 위해 법으로 노비종모법과 공노비를 해방시켜 줍니다. 천민은 노비가 주를 이루었으며 도망가는 일이 허다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민과 천민의 의식을 높여주는 예언사상이 성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학으로 들어와 종교로 변한 천주교는 평등의식을 갖게 해 줍니다. 하지만 천주교인들은 많은 박해로 인해 희생됩니다. 서학에 반해서 생긴 동학이 생깁니다. 이들은 인내천을 주장하며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하며 조선의 신분제도를 부정합니다. 이러면서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고 사회제도도 조금씩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조선 후기 외교와 조직은 양난 이후 많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방어를 위해 더 단단하게 국방을 정비하는 모습과 세금을 걷기 위해 양반 수가 증가하면서 신분제도의 변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