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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의 전기와 후기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왕권강화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 해동성국 발해는 어떤 나라일까요?

 

통일신라썸네일

 

1. 통일신라시대 전기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는 왕권이 엄청났습니다. 신라가 삼국 통일하는데 큰 몫을 한 태종 무열왕 김춘추. 당시 신라는 성골 출신들의 왕위 세습에서 최초의 진골 출신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김춘추와 함께 삼국통일에 주역 가야 출신인 김유신도 빼놓을 순 없죠. 이계기로 김유신은 높은 신분을 갖게 됩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삼국 통일을 위한 기반을 다져주고 김춘추의 아들 문무왕은 나당전쟁의 승리로 마침내 삼국을 통일합니다.

 

문무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상수리 제도로 힘 있는 귀족들을 경주에 살게 하는 제도입니다. 그리고 지방에 감찰을 보내는 외사정을 만듭니다. 죽어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으로 화장하여 동해에 묻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문무대왕릉입니다. 뒤를 이어 신문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모든 분야를 정비한 왕입니다. 신문왕은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왕권강화를 위해 당시 권력이 강했던 장인 김흠돌을 역모 죄로 진골 귀족들을 제압합니다.

 

 

귀족회의인 화백회의 장인 상대등의 세력을 약화시킵니다. 반면 집사부 시중의 역할은 강화시킵니다. 그리고 불만이 많았던 6두품을 적극적으로 등용합니다. 신문왕은 왕권강화 노력은 계속됩니다. 관료 전을 지급하고 귀족들이 사병을 가질 수 있는 녹읍을 폐지합니다. 수도가 금성이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 있어서 나라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나눕니다. 각 나라의 지방 행정조직은 시험문제에 자주 출제되는 부분입니다.

 

왕권강화 노력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군사도 정비해야겠죠. 9서당 10정으로 9서당은 중앙군대로 고구려, 백제 사람들뿐만 아니라 말갈 인들까지도 수용하면서 민족 융합을 나타냅니다. 10정은 지방 군입니다.. 유학 교육을 통해 왕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위해 국학을 만듭니다. 그리고 아버지 문무왕의 감사의 뜻으로 감은사라는 절을 짓습니다. 감은사에는 용이 머물 수 있는 지하가 있다고 합니다.

 

 

 

2. 통일신라 후기

왕권이 강화됐던 전기와 달리 후기에는 왕권이 약화됩니다. 강화를 위해 초기에 김흠돌의 난이 있었다면 후기에는 김헌창의 난으로 왕권이 추락하고 폐지 됐던 녹읍은 부활되고 왕권 김헌창의 난이란 진골끼리 왕의 자리를 위해서 싸우게 되고 이런 혼란한 상황을 틈타 지방에서는 권력을 가진 새로운 세력 호족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호족으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보고입니다. 활은 잘 다뤘지만 평민 출신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던 장보고는 고난을 감수하고 당나라로 가서 반란군들을 진압하면서 초고속 승진을 합니다.

 

 

그는 눈을 돌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무역에 관심을 갖게 되고 법화원을 만듭니다. 자수성가한 해적들에게 끌려간 신라인들이 노예시장으로 팔려가는 것을 본 장보고는 신라왕과 거래를 합니다. 해적 소탕 조건으로 기지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지금의 완도인 청해진이 만들어지고 해적들은 사라지게 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신분 상승의 꿈을 못 버린 장보고는 딸을 궁으로 보내려 하지만 꿈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세력을 갖춘 또 다른 호족 견훤이 수도가 완산주인 후백제를 세우고 자신이 미륵이라고 말하던 승려 출신 궁예는 수도가 송악인 후고구려를 세웁니다.

 

하지만 궁예는 의심, 망상 등 이상한 행동으로 폭군으로 변하게 되고 신하였던 왕건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왕건은 수도가 송악인 고려를 세웁니다. 그는 후에 후삼국을 통일하는 주인공입니다. 이제 왕견과 견훤의 양자대결로 공산전투에서는 견훤이 승리하고 그 후 고창전투에서 왕건이 승리합니다.

 

이렇게 세력이 강해진 고려의 왕건, 멸망한 발해의 세자는 고려로 귀순하고 힘이 약했던 신라는 고려에게 항복합니다. 후삼국 통일을 위해서 이제 남은 건 백제. 하지만 백제 견훤이 장남이 아닌 다른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려는 것에 화가 난 신검은 이복동생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는 일이 벌어집니다. 견훤은 금산사에서 탈출하여 고려에 귀부하고 장남 신검을 혼내주려고 합니다. 견훤은 후백제를 칠 수 있도록 왕건에게 부탁합니다. 자기가 세운 나라를 자기 손으로 무너뜨리려 하다니 그래도 아들인데 신검이 많이 미웠던 모양입니다. 마침내 왕건은 견훤과 함께 백제 신검을 치는데 그 전투가 일리천 전투이며 후삼국 통일의 밑거름이 되는 전투입니다.

 

그 후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신라를 왕건에게 바치고 자신은 경주 지역을 다스리게 됩니다. 왕건이 온건하면서도 강인한 정치를 해서 그런지 운이 좋은 것인지 발해와 신라를 비롯해 견훤까지 함께하게 됩니다. 왕건의 후삼국 통일은 잃었던 고구려의 땅까지 되찾게 되면서 진성한 삼국통일이라고 볼 수 있으며 왕위 세습이 아닌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통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삶은 녹록치 못했으며 원종 애노의 난을 비롯한 난들이 일어나고 글자가 아닌 참선을 통해 부처님의 뜻을 깨닫는다는 선종과 풍수지리가 호족들에 의해 사랑을 받습니다.

3. 발해

698년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대조영이 동모산에 건국합니다. 그래서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를 좋게 보지 않습니다. 무왕은 동생인 대문예를 시켜 당과 친해지려는 흑수말갈을 공격하고 장문휴를 중국의 산둥반도를 공격하게 합니다. 반면 문왕은 당나라와 친화정책을 폅니다. 당나라 제도를 수용하여 3성 6부를 만들고 신라와도 교류를 시작합니다.. 도읍은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합니다. 이렇게 다져진 발해는 드디어 선왕 때 전성기를 누립니다. 넓은 영토를 5경15부 62주로 정하고 신라에게 잃었던 요동을 거의 찾아옵니다.

 

 

그래서 이때의 발해를 해동성국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전성기를 누리던 발해는 거란족의 공격으로 멸망하게 됩니다. 일부에서는 백두산의 폭발로 인해 약해진 틈에 거란의 침략으로 쇠퇴했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발해가 자신들의 땅이라고 우기며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이 한참 노쟁이 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발해가 우리 역사라는 증거로 발해왕이 일본 왕에게 국서에 나는 고려왕이라고 명백하게 쓰여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배층의 대다수는 고구려인이었으며 우리의 전통 가옥구조인 온돌과 석등 등을 통해 우리의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발해는 당의 영향도 받았는데 3성 6부로 구성된 중앙 통치 조직과 감찰기구인 중정대, 교육기관인 주자감도 있습니다.

 

왕권 강화를 위해 힘썼던 통일신라 전기 하지만 후기에는 왕권이 약해지는 틈을 타 호족이라는 새로운 지배층이 등장합니다. 왕의 자리를 놓고 사이 틀어진 견훤의 부자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해동성국이라 불릴 정도로 전성기를 누린 발해가 더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