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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선포는 1897년 조선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인 고종이 황제를 선언하고 환구단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는 한국의 정치 지형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전통적인 봉건적 체계에서 벗어나는 신호탄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가만히 있지 않고 끊임없이 조선의 외교권고 주권을 빼앗아갑니다.

 

헤이그특사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

1. 대한제국 선포

500년 이상 지배했던 조선왕조는 대한제국의 성립과 함께 막을 내립니다. 왕조는 외세의 침략과 내분 등 내외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황제에 즉위하여 대한제국의 건국을 선포합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부분적으로 동아시아의 변화하는 정치적 역학 및 성장하는 제국주의에 ​​직면하여 조선을 현대화하고 강화하려는 열망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대한제국은 근대화와 개혁의 길을 모색합니다. 고종황제와 그의 참모들은 국가 기반 시설, 군사, 교육, 경제를 현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획을 실행했습니다. 독립협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정치시위라고 할 수 있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러시아의 절영도조차를 막습니다. 한러은행을 폐쇄시킵니다. 그 후 박정양과 윤치호가 함깨 주관하여 관민공동회를 개최합니다. 관민공동회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하고 재정의 일원화, 피고의 인권 존중을 주장하고 중추원 관제를 선포합니다. 하지만 고종은 이들을 믿지 못하고 황국협회를 이용해 독립협회와 만민 동공회를 강제 해산 시키게 됩니다. 이제 혼자 남겨진 고종 황제는 "광무 개혁"(광무는 그의 통치 기간에 사용된 연호)으로 알려진 일련의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고종은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대한국 국제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원수부를 설치합니다. 광무개혁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양전사업으로 지계라고 하는 토지계약문서를 발급합니다. 이것은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하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또한 상공업을 향상시키고 기술학교. 전차,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됩니다. 이렇게 광무개혁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권력을 중앙 집중화하고 정부를 강화하며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대한제국은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외국 세력의 상당한 압력을 받게 됩니다. 특히 일본은 한국에 대한 야망을 키웠고 한반도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합니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가 한국과 만주에서 패권을 다투는 러일전쟁이 발발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 1905년 한일조약이 체결되어 사실상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습니다. 1910년 일본은 공식적으로 한국을 병합하여 대한제국을 종식시킵니다. 이것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지속된 가혹한 일본 식민 통치 기간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2. 일본의 국권 침탈과 헤이그 특사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조약을 맺고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를 끊게 됩니다. 일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드린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만주 진출을 저지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대립이 심해지고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 전쟁 중에 일본은 대한제국에 군사용 토지를 사용하겠다는 한일 의정서를 제출하고 우세였던 일본이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합니다. 내용은 재정과 외교 고문을 파견합니다. 그리고 2차 한일협약은 을사늑약을 체결하는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동감정치가 이루어집니다. 을사늑약을 체결하는 주요 인물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의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이 있습니다.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고종은 일본 몰래 네덜란드 만국평화회의에 헤이그 특사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보내는 외교활동을 펼칩니다. 을사조약을 이미 각각의 국가가 승인했기 때문에 한국정부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행사할 수 있다하여 회의 참석과 발언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비공식 경로를 통해 신문기자단 국제협회에 참석하여 한국의 비참한 현실과 도움을 요청합니다. 특사 파견으로 큰 성과는 없었지만 세계열강에게 을사조약의 무효임을 알리는 역사적 의미가 잇습니다. 국내에서는 헤이그헤이특사 파견이 조약 위반이라고 하여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키고 고종의 아들 순종을 황제로 즉위시킵니다. 대한제국의 왕을 일본인들이 강제로 퇴위시키고 즉위시키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일본은 한일신협약을 체결합니다. 내용은 군대해산, 일본인 차관이 가능해지면서 통감정치가 더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사법권을 강탈하는 기유각서를 체결합니다.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인 이완용과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합병조약을 통과시키고 마침내 1910년 8월29일 국권피탈이라 하여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것을 경술국치라고도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인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일본은 한반도를 통치하려는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마침내 조선의 외교권 발탈, 사법권 박탈, 주권까지 박탈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다른 나라의 도움 요청했던 일이 없었더라면, 우리끼리 해결 했더라면 현재 우리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