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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경제 침탈은 1978년 강화도 조약을 시점으로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관세가 없으며, 최혜국 대우는 체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0리 이상 밖에서는 무역을 할 수 없는 개항장 무역과 곡물을 무제한 유출을 막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침탈을 막기 위해 어떠한 저항들이 일어났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우리 민족의 경제 침탈
러시아를 막기 위해 미국과 수교해야 한다는 조선책략이라는 책에 의해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합니다. 내용으로는 우리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미국이 개입해서 도와주겠다는 거중조정과 강화도 조약 때 없던 관세를 이때 관세가 추가되고 최혜국 대우가 채결됩니다. 그러면서 보빙사라는 사절단이 파견됩니다. 유길준이 보빙사로 파견되고 서유견문이라는 책을 씁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후 내지 무역이 가능해집니다. 이 결과 청나라, 일본 상인들이 내지로 들어오게 되고 청과 일본이 서로 경재 하며 갈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보부상, 객주, 여각 등의 우리나라 전통상인 무역에 타격을 주게 됩니다. 무제한 곡물 유출을 막을 수 있는 방곡령 조약이 포함된 조일통상장정 조약이 1983년에 맺습니다. 최혜국 대우 조약이 최결 된 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 시기에는 다른 나라들의 이권침탈이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러시아는 삼림 채별권, 절영도조차, 한러 은행을 요구하고 미국은 운산금광, 경인선, 철도부설권을 프랑스는 광산 채굴권, 경의선 철도부설권을 요구합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 시설 강령을 통해 황무지개간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토지를 차지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을사늑약 체결 시 일본은 경제적 시스템을 장악하기 위해 화폐 정리 사업을 추진하면서 우리나라 화폐 백동화를 제일 은행권으로 바꿉니다. 일본은 백동화와 제일은행권의 가치를 똑같이 평가하지 않아 백동화를 많이 보유하고 있던 은행이나 상업 쪽에서 많은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백동화를 만들어 내던 전환국이 문을 닫게 되고 금 본위제를 시행합니다. 처음 강화도 조악은 물자를 교환하는 단계, 아관파선 시기에는 우리의 이권을 침탈하는 단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시점에서는 조선의 토지를 빼앗아 가려했습니다. 그리고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조선의 경제 시스템을 장악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한 단계, 한 단계씩 시행하고 있는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2. 경제 침탈에 대한 구국운동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조약으로 조선으로 외국의 거대 상인들이 들어오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나라도 자본을 모으기 위해서 주식회사를 만듭니다. 대표적인 주식회사로는 대동상회, 장통회사가 있습니다. 조일통상장정에서 맺은 방곡령을 함경도, 황해도 지역의 지방관을 중심으로 시행하며 우리의 곡물 주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방곡령 시행을 한 달 전에 일본에 알려야 했지만 그것이 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일이 생기고도 했습니다. 갑오.을미개혁 당시 조선은행, 한성은행, 천일은행들이 등장합니다. 지금 은행들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관파펀 당시 이권 침탈 대응으로 이권 수호 운동이 벌어집니다.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열고 절영도초차를 막아내고 한러은행을 폐쇄시킵니다. 내지 무역으로 힘들어진 전통 상인들을 위해 종로의 특권을 누렸던 시전상인들을 중심으로 황국중앙 총 상회 단체를 만들어 상권수호운동을 펼쳐 나갑니다. 황무지개간 반대 운동으로는 보안회와 농광회사가 일본의 황무지 개간을 막기 위해 반대합니다. 그리고 정미 7 조약 과정에 일본에 너무 의존하고 차관을 너무 많이 썼다고 생각하여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펼칩니다. 이 운동은 1300만 원의 나라 빚을 우리의 힘으로 갚자는 운동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항일 구국운동으로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으며 대구에서 출발해서 전국으로 확산됩니다. 전국으로 확산된 국채보상운동은 신분을 뛰어넘어 모든 국민들이 참여하였습니다. 국채보상운동과 비슷하게 1998년 금융위기 IMF 때 금 모으기 행사가 있었습니다. 전 국민이 나라를 살리자는 한 뜻으로 집에 있던 돌 반지까지 모두 가지고 나왔던 모습들이 떠올랐습니다.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은 2017년 10월 3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정식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이 어려움에 처한 나라를 살리고 이러한 모습들을 후세에게도 살아있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국채보상운동 홈페이지에서 더 많은 자료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국채보상운동 홈페이지에서 더 많은 자료를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http://gukchae.com/
조선의 개항기 때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청나라, 일본, 미국에게 우리의 주권을 하나하나 내어주는 사람들 속에서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 민족의 대응과 저항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저항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기 힘들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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