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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의 일제강점기 정책과 경제들이 우리 민족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910년 8월 29일 한국의 치욕적인 날, 바로 일본에게 우리의 국권을 상실한 날입니다. 그래서 국가적 치욕이란 뜻으로 경술국치라고 합니다. 이날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시작하겠습니다.
1. 일제강점기 <정치>
1910년 8월 29일 치욕적인 날입니다.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게 양도한다는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날입니다. 바로 우리의 민족의 국권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1910년대 일본은 무단통치를 합니다. 군인 출신의 총독이 우리나라로 파견됩니다. 그러면서 헌병이 민간인까지 관리하는 헌병경찰이 등장합니다. 이들에게는 즉결처분권이라는 막강한 힘을 부여받았으며 태형을 할 수 있는데 한국인들에게만 적용됐다고 합니다. 헌병경찰은 한국인들을 무력으로 통치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도 한국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역사 교과서에 보면 칼을 찬 교사들이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진을 볼 수 있는데 1910년대에 학교 모습입니다. 순진한 어린 아이들 앞에서 칼을 찬 선생님이라? 공포를 조성하고 강압적인 교육을 받았으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학제에서도 한국 학생은 4년, 일본 학생은 6년으로 차별 교육을 시실 하였습니다. 이러한 무단통치로 인해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납니다. 우리민족의 저항 운동이죠. 그러면서 일제는 1920년대는 민족 분열을 위한 운화통치를 실시합니다. 1910년대 무관만이 총독이 가능했던 것을 문관도 가능토록 하지만 광복될 때까지 문관이 총독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중추원이 자치를 위한 도평의회, 부면협의회 같은 지역 회의체를 만들지만 일본인들을 위한 자치였습니다.
또한 중추원은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역사 왜곡을 합니다. 헌병경찰은 보통경찰로 바뀌지만 수를 더 늘려서 한국인들의 감시가 더 심해지고 태형은 없애지만 치안 유지법을 만들어 처항하는 한국인들이 잡아들입니다. 그리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창설하지만 엄청난 검열을 통해 정간이나 삭제를 하게 됩니다. 학제를 동일시하는 2차 교육령을 발표하고 일제의 식미통지지배를 위해서 경성제국대학교를 세웁니다.
저도 이번에 알았지만 경성제국대학교가 지금의 서울대학교라는 것을 알고 조금은 놀랬습니다. 1930년대는 일본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우리민족에게는 민족말살통치를 합니다. 가장먼저 일본 이름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실시하고 황국 신민 서사를 암송해야 했습니다. 신사참배와 궁서요배를 강요합니다. 조선, 동아일보는 폐간하고 조선어 사용을 못하게 합니다. 황국신민이라는 뜻의 초등학교령을 발표합니다. 이런 뜻의 초등학교를 그렇게 오랫동안 사용하고 있었다니 우리 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일본 문화가 참 무섭습니다.
2. 일제강점기 <경제>
1910년 일본은 재정확보를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합니다. 자신의 땅임을 증명하고 신고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에게 땅을 빼앗기고 맙니다. 당시 대부분의 농민들은 소작농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경작권이 있었죠. 하지만 이시기 경작권이 인정되지 않고 계약직 농민으로 바뀌게 됩니다. 토지조사사업 소식을 듣지 못하고 기한을 넘기면 그 땅도 일본이 가져 갑니다. 이렇게 한국 땅을 조금씩 일본이 잠식해 가고 있습니다. 한국인이 회사를 세우려면 총독부에 허가를 받아야하는 회사령을 실시합니다. 하지만 민족자본의 증가를 염려한 일본은 이를 허가하지 않습니다.
우리 땅에서 우리 민족이 회사를 차리겠다는데 일본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뿐만 아니라 허락도 해주지 않다니 일본이 한국을 경제적으로도 일어설 수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1920년대에는 산미증식계획을 실시로 인해 쌀 생산량은 증가하지만 일본이 가져가는 양은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해결책으로 만주의 값싼 쌀을 수입하여 해결해야 했습니다. 쌀의 단작화와 상품화 현상으로 농민들의 삶은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1910년 허가제였던 회사령을 신고제로 바뀌고 관세를 폐지합니다. 이모든 것들이 일본 상인들을 위한 것으로 나중에 한국의 자본가들은 위기를 겪게 되면서 물산장려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1930년데 산미증식계획을 어려워진 농촌을 살리기 위해 농촌진흥운동을 펼치지만 실패합니다. 남쪽에는 면을 재배하고 북쪽에는 양을 키우는 남면북양정책을 실시합니다. 군수물자 제공을 위해 북쪽을 병참기지화정책을 펼칩니다. 일본은 많은 전쟁으로 국가총동원법 실시로 전쟁에 필요한 사람과 물자를 한국인들에 의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인들의 정신적, 물질적 피해가 엄청났으며 현재도 그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계시는 분들이 존재합니다.
이렇게 35년간의 일제 식민지, 그 기간에 우리 민족의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이겨내어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있음에 감사한 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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