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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일어난 갑오개혁은 근대화의 결정적 시기이자 조선왕조 말기의 시작을 알린 사건으로 조선이 근대 국가로 변모하는 길을 열게 됩니다. 하지만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 실시로 을미개혁이 일어나고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살펴보겠습니다.

 

명성황후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1. 갑오개혁

개혁을 요구하는 농민들의 대규모 봉기였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정부의 나약함과 부패를 폭로합니다. 고종은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정부, 군대, 경제 및 사회를 현대화하여 외국의 위협과 내부 불안에 맞서 국가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갑오개혁 이전 조선의 외교는 청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다른 나라들과 좀 더 자주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고자 했습니다. 고종은 군대를 현대화하고 서양식 훈련을 도입하고 새로운 군사 기술과 장비를 채택하기 위해 군사 개혁을 시작합니다.

 

양반계급은 조선의 전통적인 지배 세력이었으며, 갑오개혁은 신분제 폐지를 통해 보다 평등한 사회를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갑오개혁은 한국의 교육 시스템을 현대화하고 새로운 학교와 커리큘럼을 도입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지식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개혁은 산업 발전, 무역 촉진, 보다 견고하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경제 창출을 목표로 경제 문제도 다루었습니다. 1차 갑오개혁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개혁을 압박하게 됩니다. 그래서 김홍집과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개혁기구인 군국기무처가 만들어집니다. 의정부 8아문으로 바꾸고 궁내부를 설치합니다.

 

그리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재정을 재정 담당을 탁지아문으로 일원화시킵니다. 세금은 현금으로 내게 하고 은 본위제를 실시합니다. 마침내 제일 중요한 신분제가 폐지 과부 재가가 허용됩니다. 그리고 과거제가 폐지됩니다. 2차 갑오개혁에서는 의정부 8아문을 내각 7부로 변경하고 지방은 8도를 23부 체제로 바꿉니다. 그리고 재판소가 설치됩니다. 근대 학제인 교육입국조서를 반포합니다.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외국어학교가 만들어집니다.

 

그동안 이런 변화를 시도했던 많은 개혁과 희생들이 만든 결과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일본의 개입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이어져 조선에 더 많은 독립을 허용했지만 일본이 조선의 외교 문제에 상당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갑오개혁은 국내외적 도전에 대응하여 근대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부각시킨 한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2. 을미사변, 을미개혁

을미개혁은 1895년 조선후기에 일어난 한국사에서 실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정부와 행정의 근대화를 목표로 한 정치개혁이었으며, 근대화를 향한 한국의 길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결국 조선왕조를 끝내게 만듭니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과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습니다. 이 조약의 내용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한 조약이지만 일본은 조선과 청의 관계를 끊어 놓기 위한 계획이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요동반도를 획득하지만 러시아 중심으로 프랑스, 독일의 삼국의 간섭으로 요동반도는 반납하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본 명성황후는 러시아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일본은 그런 한 나라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처참한 일이 벌어집니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일어난 일이여서 손 쓸 틈도 없이 어떠한 대응도 못하고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이 을미사변입니다.

 

그리고 김홍집을 중심으로 근대화 개혁이 추진됩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실시 된 단발령은 전국의 유림들에게 반일, 반개화 운동으로 이어집니다. 나의 목을 자를 수 있으나 나의 두발은 자를 수 없다는 최익현의 말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전국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고 친위군대와 일본군이 진압에 나서고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즉 아관파천이 이루어집니다. 을미개혁의 주요 내용은 단발령, 태양력사용, 소학교설치, 종두법시행 등을 주장합니다. 을미개혁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근대화, 서구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특정 서구 행정 관행을 채택하고 보다 중앙 집중화되고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또한 정부와 사회의 양반계급의 거센 반발에 부딪치고 개혁 노력은 저항에 부딪혔고 실행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을미개혁은 고종이 정권을 근대화하고 권위를 내세우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난관에 봉착했고 결국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을미개혁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여 결국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사실상 한국을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었고, 궁극적으로 1910년 조선을 일본에 병합하게됩니다.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은 조선후기 근대화와 개혁의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비록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의 근대화와 변혁을 위한 후속 노력을 위한 무대를 마련하는 역할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