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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천하 갑신정변은 1884년 조선에서 일어난 중요한 정치, 군사적 봉기입니다. 조선후기 개혁파와 온건파의 투쟁에서 중추적 사건이었습니다. 갑신정변은 급진 진보적 개혁파들이 한국에 정치적 변화와 근대화를 빠르게 가져오려는 시도였습니다. 또한 조선 역사의 전환점이 될 수 있었던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동학농민운동

1. 3일 천하 갑신정변

19세기 후반 조선은 한반도는 외세의 내적 갈등과 외압에 시달렸습니다. 수세기 동안 조선을 통치해온 조선 왕조는 시대에 뒤떨어진 통치, 부패, 외세의 간섭과 위협 등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급진 개화파는 정부와 군부 내에서 발생합니다. 그들은 조선의 군사와 행정을 강화하기 위해 근대화와 서구식 개혁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합니다. 당시 급진 개화파의 주요 인물들은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당시 조선의 왕 고종은 처음에는 개혁주의에 동조했고 근대화 노력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1884년 12월 개화파는 정권을 장악하고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쿠데타를 시도합니다. 그들의 주요 목표는 현대화된 군대를 설립하고 정부 구조를 개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일본에서 자금을 빌리려 하지만 실패하고 마침 청나라 군의 일부가 철수하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이 열리는 날에 정변을 일으킵니다. 많은 인사들이 모인 장소이니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때 많은 민씨 세력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고종과 명성황후를 확보 후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창덕궁으로 갑니다. 개화파의 개혁 조항은 14개로 흥선대원군 환국과 청나라의 사대, 조공폐지, 문벌폐지, 실력과 재능에 의한 인재 등용, 지조법 개혁, 내시부 폐지, 전후 국가에 해독을 끼친 관리 처벌, 각 도의 환상미 영구 폐지, 규장각 폐지, 순사 설치, 혜상공국 폐지, 전후 유배 또는 금고 된 죄인 다시 조사, 4영을 1영으로 하고 근위대 설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리, 대신과 참찬은 매일 의정부에서 회의, 의정부와 6조 외 불필요한 관청 혁파 이렇게 14개 조항을 요구했습니다. 개혁에 반대하는 온건파는 갑신정변을 진압하기 위해 중국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합니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이 한국에 파견되었습니다. 초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갑신 쿠데타는 궁극적으로 온건파와 중국의 개입을 버틸 수 있는 충분한 지지와 군사력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청나라의 진압으로 청의 내정간섭이 더욱 강화되고, 조선에서 청과 일본군대가 철수하고 다른 나라가 개입하면 상대국에 통보해야 한다는 텐진조약을 청과 일본이 맺습니다. 텐진조약은 훗날 조선을 또 한 번 뒤흔드는 사건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 공사관이 불타버리면서 일본과 배상금 지급과 공사관 신축을 약속하는 한성조약을 맺습니다. 이렇게 집권세력들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으니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박영효와 홍영식은 전사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은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3일 천하의 개혁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개량주의 운동에 차질을 빚었고 많은 지도자들이 살해되거나 추방당했습니다. 자신의 안전을 두려워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하면서 한국 외교 관계의 변화를 알렸습니다. 감신정변 실패 이후 고종은 한국의 정치 및 경제 시스템을 현대화하기 위한 시도로 갑오개혁으로 알려진 일련의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온건파의 반발에 부딪혀 결국 목적을 달성하지 못합니다. 갑신정변은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개화파와 온건파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음을 부각시켰습니다. 또한 외국의 개입에 직면한 조선이 직면한 도전과 외부 압력을 견디기 위한 현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갑신정변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조선의 정치 지형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나아가 조선 왕조의 궁극적인 쇠퇴와 몰락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동학 농민 운동

동학농민운동은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회, 정치적 운동입니다. 이는 조선 역사상 가장 광범위하고 영향력 있는 농민 봉기 중 하나였으며 결국 조선 왕조의 쇠퇴와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1890년대 한국의 사회, 경제, 정치적 혼란기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시기 조선은 내부 불안, 영향력을 추구하는 외세의 외부 위협, 농촌 인구 사이에 만연한 빈곤과 농업 곤경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이 운동은 초기에 1860년대에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이라는 종파에서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동학은 유교, 불교, 민속신앙의 요소를 혼합하여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고 외세에 저항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농촌인구, 특히 소작농의 고충에 의해 추진되었습니다. 그들은 무거운 세금, 가혹한 생활 조건으로 인해 부담을 느꼈습니다. 1893년 정부가 동학 추종자들을 탄압하려고 시도하면서 운동이 탄력을 받습니다. 전봉준과 김개남을 중심으로 동학파는 정부와 지주에 대한 무장투쟁을 시작합니다. 동학 농민 운동은 고부동기를 시작으로 백산동기부터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수만 명의 농민과 기타 불만 집단을 포함하여 조선 남부 지역으로 빠르게 퍼졌습니다. 본격적반란군은 무장 민병대를 조직하고 사회 개혁, 토지 재분배, 부당한 세금 폐지를 요구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내외적 압력을 받으며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정부는 이번에도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청나라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개입은 갈등을 악화시켰고 반군의 반대는 더욱 커졌습니다. 하지만 갑신정변 때 맺은 텐진조약으로 일본군이 조선으로 파병됩니다. 이렇게 청나라와 일본군이 조선으로 들어 오면서 정부는 동학 농민들과 화해를 하게 됩니다. 동학농민은 집강소를 정부는 교정청을 만들어 서로 개혁을 논의 합니다. 폐정개혁의 내용은 신분제폐지, 토지균등분배, 과부재가허용 등을 주장합니다. 한편 일본군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있는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그러면서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에 맞서기 위해 동학농민운동이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공주의 우금치전투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지만 성공하지 못합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동학농민운동은 한국 사회의 깊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폭로하고 조선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것은 또한 조선에서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추구하는 미래의 운동과 봉기를 위한 무대를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은 조선 역사의 전환점이었으며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조선이 근대 국가로 변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